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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저예산 영화에서 헐리우드의 정상까지


2008년 슈퍼히어로물 [다크 나이트]로 영화사의 기록을 다시 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아트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헐리우드의 절대적인 신뢰를 획득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의외로 굴곡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천재성이란 이런 것인가. 신작 [인셉션]이 개봉과 동시에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오는 걸작들과 비교선상에 오르며 완벽에 가까운 찬사를 받고 있다. 불과 7편의 장편으로 헐리우드 정상에 선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이제 그의 영화인생과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970년 7월 30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7세때 아버지의 슈퍼 8mm 카메라를 가지고 액션 피규어를 이용한 몇몇 영상물을 만들었으나 정작 대학에서의 전공은 영화와는 관련없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놀란은 [타란텔라 tarantella]이라는 단편을 발표해 PBS 영상조합에서 상영회를 갖게되면서 영화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그 후 놀란이 영화계에서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것인 1996년 캠브리지 필름 페스티발에서 단편영화 [절도 larceny]와 함께 3분짜리 단편 [두들버그]를 선보이면서 부터다. 특히 작은 크기의 나를 때려잡는 주인공이 더 큰 자신에게 다시 때려잡히게 된다는 기발한 발상의 흑백영화 [두들버그]는 현대인의 강박관념에 대한 상징성을 강하게 내포한 초현실주의적 단편영화다.

이로부터 이듬해 그는 약 6천 달러의 초저렴한 제작비를 들여 미스테리 스릴러 한편을 찍기 시작한다. 1년간의 촬영끝에 완성된 작품의 제목은 [미행 Following]으로서 무명배우와 가족들을 출연시켜 완성시킨 70분짜리 중편 영화다. 직업이 일정치 않은 실직자가 다른 사람의 뒤를 좇는 일을 재미삼아 반복하다가 미행당한 당사자에게 들키고 난 뒤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는 내용의 [미행]은 1930년대 흑백 느와르 영화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놀란의 초기 걸작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놀란은 시간의 순서를 뒤바꾼 편집방법을 통해 저예산 영화의 부족한 부분을 상쇄했는데, 결국 이 같은 편집의 묘미는 차기작 [메멘토]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 Next Wave Films. All rights reserved.

[미행]의 수익금을 차기작 [메멘토]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놀란은 단 25일간의 짧은 시간내에 영화를 완성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동생인 조나단 놀란의 시나리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단기 기억상실증이란 특이한 질환에 걸린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전작인 [미행]처럼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뒤집는 시간의 역순 배치를 통해 충격적인 결말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헐리우드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메멘토]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으며, 아카데미 각본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로 지목되어 [고스포드 파크]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비록 아카데미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본 작품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헐리우드의 제작자들 눈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 Summit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고작 제작비 5백만 달러를 투입해 3천9백만 달러(월드와이드)의 흥행수익을 올린 [메멘토] 덕분에 이를 눈여겨본 워너측에서는 놀란에게 5천만 달러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놀란은 그가 평소에 꿈꿔왔던 노르웨이 감독 에릭 스코졸드재르그(Erik Skjoldbjaerg)의 1997년작, [인썸니아]의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10배나 급등한 제작비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된 놀란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다른 사람의 돈인데, 뭐 어때요 ㅎㅎ'


알레스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가 불면증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실수로 동료 형사를 쏴 죽이고 그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묘한 상황을 다룬 [인썸니아]는 알 파치노와 로빈 윌리엄스를 비롯, 2차례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힐러리 스웽크까지 헐리우드의 실력파 배우들과 함께 하였는데, 흔히 신인급 감독이 스타들을 통제하지 못해 실패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이들의 연기대결을 무난하게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리메이크지만 원작에 나타났던 중의적이고 함축적 메시지가 잘 드러난 심리 스릴러의 수작으로 극찬받으며 단숨에 M. 나이트 샤말란이나 커티스 핸슨 감독과 같은 스릴러계의 거장들과 나란히 평가받는 위치로 급부상하게 된다.

ⓒ Summit Entertainment/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인썸니아]의 성공 후 놀란이 관심을 가지게 된 작품은 바로 헐리우드의 유명한 제작자이자 기인으로 유명한 하워드 휴즈의 전기영화였다. 그러나 각본이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돌입할 무렵 마틴 스콜세지의 [에비에이터]가 제작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좌절한 그에게 워너측은 자사의 대표적인 프렌차이즈 '배트맨'시리즈의 부활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고작 [메멘토]와 [인썸니아] 단 두편의 스릴러로 헐리우드에 이름을 알린 그에게 이같은 제안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는데, 이때 놀란은 워너측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바로 [배트맨 비긴즈]를 저예산 영화로 만들겠다는 것.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이 작품에 관심을 보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 비긴즈]는 1억 5천만 달러짜리 대형 블록버스터가 되고 말았다.

ⓒ Warner Bros. Pictures/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크리스토퍼 놀란은 맡은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그는 팀 버튼의 그늘에 가렸던 [배트맨]의 영향력에서 한발짝 더 나아갔으며, 사실주의적인 노선으로 돌아온 신세대 배트맨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초호화 캐스팅의 대작임에도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건 [인썸니아]에서 이미 입증된 놀란의 훌륭한 통제력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배트맨 비긴즈]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작가주의 감독이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면에서 무척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이로서 작품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놀란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 졌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의 성공 후, 놀란은 블록버스터 연출에 대해 심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그는 다시금 저예산 영화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놀란은 [메멘토]를 제작할 당시부터 생각해 두었던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원작소설에 관심을 나타냈다. 서로의 마술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두 명의 라이벌 마술사가 위험천만한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의 [프리스티지]는 전반적인 완성도를 볼 때 놀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평이한 편에 속하고, 지나치게 반전을 의식한다는 인상을 주었던 작품이지만 4천만 달러의 비교적 저예산으로 놀란이 '머리를 식히며 만든'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Warner Bros. Pictures/ Touchston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프리스티지]로 가볍게 몸풀기를 끝낸 놀란의 다음 작품은 3년을 기다린 [배트맨 비긴즈]의 후속편이었다. 놀란에게는 두 번째 블록버스터이자 처음으로 시도하는 속편, 그리고 헐리우드에 진출한 후 5번째 작품인 이 영화의 제목은 [다크 나이트]였다. '배트맨' 영화 중 유일하게 '배트맨'을 타이틀에서 제외시킨 이 작품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함과 동시에 그저 때려부수면 끝나는 블록버스터의 고정관념을 벗어 버린 아트무비의 경지에 올랐다.

ⓒ Warner Bros. Pictures/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슈퍼히어로라는 기본적인 틀 속에서 범죄 느와르적 요소와 스릴러를 접목시킨 [다크 나이트]는 대중성과 예술적 가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며 대단히 진귀한 성과를 거둔 21세기의 걸작으로 남게 된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히스 레저의 불꽃같은 연기는 기존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보여준 잭 니콜슨의 조커를 뛰어넘어 전설이 되었다. 아울러 고뇌하는 어둠의 기사, 배트맨을 보다 진중하게 소화해 낸 크리스천 베일 역시 흥행성과 연기력을 갖춘 젊은 배우로서 최고의 주가를 누리게 되었다.

이상으로 살펴본 놀란의 작품 속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그의 작품들의 장르적 베이스가 스릴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의 영화에서 여배우는 모두 조연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탐구, 즉 죄책감과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제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기존의 작품들이 모두 별도의 원작자가 있거나 리메이크였던 것과는 달리 [인셉션]은 순수하게 자신의 손에서 재탄생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셉션]으로 또한번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을 것인지, 아직 10편의 영화도 채 만들지 않은 이 천재감독의 행보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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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영화 마니아 섹션 정규 필진, Daum View 베스트 블로거기자, DVD Prime 객원 필자, 2007~2009 티스토리 우수 블로거 3년 연속선정,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To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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