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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와 만화원작의 역사

한국영화와 만화원작의 역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각주:1]는 서양속담처럼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최근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전세계의 영화계에서는 극심한 소재 고갈에 시달리고 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반복에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영화들을 들여오거나 고전 영화들을 리메이크 하는 등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변형, 또는 이용하는 관행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재 발굴은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그리고 절실한 일일 것이다.

비단 현재 뿐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제작자들은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창작물을 소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호해 왔다. 그것이 게임이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이같은 원작의 영화화는 일단 소재 고갈이라는 원천적인 고민을 손쉽게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만화원작의 영화화(이하 코믹스 무비)는 관객에게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준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방대한 그래픽 노블과 코믹스의 무한 소스를 지닌 미국 영화계는 오랜 노하우를 축적한 결과 [다크 나이트] 같은 희대의 걸작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를 계기로 만화원작의 영화화를 접하는 연출자들의 자세가 확연히 달라진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 역시 만만찮은 만화원작을 보유한 나라다. 헐리우드에서 형민우 원작의 '프리스트'를 직접 제작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꾼으로서 한국 만화가들의 실력은 이미 수준급이다. 영화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코믹스 무비는 1926년 작 [멍텅구리]다. 노수현 화백이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명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이 작품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헐리우드 코미디의 영향을 이어받은 영화다. 비록 감독 스스로도 불만족스럽다는 입장을 표명하긴 했지만 영화는 크게 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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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미상


하지만 만화를 천대하던 한국 정서의 특성 때문일까. 영화판에서 만화원작을 사용하려는 시도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코믹스 무비는 1978년에 이르러서야 탄생하게 된다. 허영만 화백의 히트작 '각시탈'를 스크린으로 옮긴 [철면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영화 최초의 다크 히어로를 탄생시킨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철면객]은 비록 B급 권격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내러티브의 구조나 액션 연출에 있어서 꽤나 흥미롭게 완성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필름조차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아 전문 영화기자라고 하는 사람들 조차 한국 코믹스 무비를 언급할 때 이 영화의 존재사실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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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흥행/ Filmark International Ltd. All rights reserved.

한국 최초의 다크히어로물 [철면객]. 비록 유사 권격물이 쏟아질 무렵 나온 작품이어서 평가절하되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영화적 완성도는 꽤나 괜찮은 편이다.


이듬해 등장한 장미희 주연의 [순악질 여사]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길창덕 화백의 명랑만화를 소재로 삼은 본 작품은 당시 관객 68000명의 기록을 세우면서 나름 인기작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로서 영화인들은 만화원작에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만화가 강철수의 '팔불출'를 원작으로 한 고응호 감독의 [풍운아 팔불출]은 1980년대 코믹스 무비의 붐이 일어나기 직전에 태어난 작품이다. 사회적으로도 혼란한 시기였던만큼 영화시장 자체가 침체된 상황에서 [풍운아 팔불출]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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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악질 여사 ⓒ 연방영화/ 풍운아 팔불출 ⓒ 동협상사. All rights reserved.


그로부터 6년 뒤 대본소 만화계의 베스트셀러인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서울 관객 28만명 동원이라는 희대의 흥행성적을 거두며 코믹스 무비의 흥행성을 단박에 부각시켰다. 80년대식 연출 스타일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지닌 매력과 원작의 탄탄한 내러티브, 인기가수 정수라의 매혹적인 주제가 등 갖가지 흥행요소가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대히트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80년대 코믹스 무비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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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필름. All rights reserved.


이를 계기로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한희작의 '손자병법',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발바리의 추억', 방학기의 '들병이' 등 수많은 대본소 만화들이 영화화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작품들은 흥행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히려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성공이 우연으로 보일만큼 1세대 붐을 타고 제작된 코믹스 무비들은 실망스런 완성도를 보였고, 이는 당연히 흥행실패의 쓰디 쓴 결과로 이어졌다.

1990년대는 혼돈의 시기였다. 일본만화시장의 개방으로 일본의 코믹스가 그야말로 물밀 듯 밀려오는 상황에서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무판권 코믹스 무비가 비디오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왕룡 감독의 [드래곤 볼], [북두의 권] 같은 희대의 괴작이 탄생했던 것도 이같은 시류의 결과물이다. [영심이]나 [48+1] 같이 저예산 작품의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작품들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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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동화 All rights reserved.

왕룡 감독의 [북두의 권]. 부론손과 하라 테츠오의 원작 만화를 영화화에 대한 정식 라이센스도 없이 무단으로 실사화한 작품. 덕분에 일본 자국에선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국영화계에서도 흑역사의 한켠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걸작들도 탄생했다. 허영만 원작의 [비트]와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영상화한 [테러리스트]는 90년대 코믹스 무비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먼저 [테러리스트]의 경우 '모래시계'의 태수 역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액션스타 최민수를 전면에 내세워 유사 캐릭터를 적절히 재활용해 성공한 케이스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종종 눈에 띄지만 [테러리스트]는 흥행요소와 한국식 느와르 요소가 적절히 가미된 작품으로서 당시 기준으로 볼때는 잘 만든 상업영화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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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익필름. All Rights Reserved.


[비트]는 한국영화가 지닌 액션 연출의 한계를 수용하고 이를 뛰어난 미장센과 속도감으로 극복해 성공을 거뒀다. 정우성, 고소영, 임창정, 유오성 등 젊은 신예들의 빼어난 매력도 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특히나 원작의 내러티브에 안주하지 않고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원작을 재해석한 김성수 감독의 과감한 결단도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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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노필름. All Rights Reserved.


2000년대에는 다양한 시도들이 반영된 시대다. 천만관객시대를 연 한국 영화계의 풍부한 자금력과 세대교체에 성공한 실력있는 연출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질적, 양적인 팽창이 수반됨과 동시에 원작만화가 소모되는 경향도 드러났다. 2000년대의 포문을 연 코믹스 무비는 [비천무]다. 김혜린 원작의 동명만화를 바탕으로 한 본 작품은 신현준, 김희선 등 톱스타가 출연하고 40억원의 대자본이 투입된 최초의 블록버스터형 코믹스 무비다. 하지만 어색한 연기와 완성도 낮은 특수효과, 빈약한 스토리 등 원작팬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사실상 실패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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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원작만화를 재해석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충격적 반전과 스타일리시한 연출의 결과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예상외의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특히나 일본만화를 바탕으로 원작의 틀만을 유지한채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 [올드보이]는 오히려 원작을 넘어선 코믹스 무비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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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코믹스 ⓒ 1998 TSUCHIYA GARON,MINEGISHI NOBUAK/ 영화 ⓒ 쇼이스트㈜, 에그필름. All Rights Reserved.


여기에 스즈키 유미코의 원작을 각색한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 역시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이정표를 제시하며 흥행에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뒀다. 역시나 원작의 틀만을 유지한채 내용과 구성을 영화에 걸맞게 재구성한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렇듯 외국 만화를 훌륭하게 재해석한 [올드보이]나 [미녀는 괴로워]의 성공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자국의 만화원작에 대한 해외 라이센스를 금지하는 암묵적 룰이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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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시스 픽쳐스/ KM 컬쳐 All Rights Reserved.


물론 실패작들도 눈에 띄었다. 2000년대 한국 만화계의 트랜드인 웹툰 만화가 활성화되면서 떠오른 작가들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강풀 작가의 원작들이다. 강풀 원작의 특징은 영화적 구성력이 작품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화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강풀의 원작만화는 [아파트], [바보], [순정만화] 등 세편이 연속해서 영화화되기에 이른다. 한차례 제작이 좌절된 [26년]이나 [타이밍]도 영화화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들 작품들은 모두 신통찮은 반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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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 토일렛픽쳐스㈜ /바보 ⓒ 와이어투와이어필름, CJ엔터테인먼트 /순정만화 ⓒ CJ엔터테인먼트,렛츠필름. All rights reserved.


한국 공포영화의 선두주자인 안병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아파트]는 기대를 깨고 재앙급 실패작이 되었다.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구성된 [바보] 역시 희안하리만치 반응이 저조했다. 뛰어난 캐릭터 매칭과 그럭저럭 괜찮은 각색이 어우러진 [순정만화]도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영화인들과 팬들은 강풀 원작만화의 실패로 인해 반드시 영화적 구성력이 돋보인다 해서 영화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인터넷 아마추어 작가 B급 달궁의 B급스런 원작을 영화화 한 [다세포 소녀] 역시 원작의 장점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채 실패작으로 기록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제작에 들어갔던 방학기 원작의 [역도산]과 [바람의 파이터]는 캐스팅이나 물량 면에서 제접 공을 들인 작품이었음에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두 사람이다], [수], [더 게임] 등도 실패작의 반열에 올랐다.

한편 허영만 화백의 원작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타짜]와 [식객]의 성공은 이야기꾼으로서 허영만의 원작이 지닌 장점이 영화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특히 이들 두 작품의 경우는 방대한 원작의 내용 중 일부만을 극화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속편을 내놓을 여지가 충분하다는 장점도 있다. 이미 [식객]의 경우는 속편이 개봉되었고, [타짜]는 TV판으로 연장되었다. 한국에서도 코믹스 무비의 프랜차이즈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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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 싸이더스FNH/ 식객 ⓒ 쇼이스트. All rights reserved.


2010년에 접어든 이 시점에 코믹스 무비의 제작은 80년대의 1차 붐에 이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강우석 감독의 [이끼]가 올해의 극장가를 장식했고, 특히나 [이끼]의 경우는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원작만화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흥행에 있어서 순조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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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마서비스, 렛츠필름. All rights reserved.


앞으로도 원작만화의 영화화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기억해야 할 점은 아무리 매력적인 원작이라 하더라도 이를 소화해내는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상당수 작품들이 단순히 원작만화의 캐릭터 싱크로를 위주로 접근해 실패했거나 혹은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베끼는 것에 안주해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관건은 '원작의 재해석'에 달려있다. 원작보다 더 매력적인 영화만의 장점을 덧입는 것. 이것이야말로 원작만화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재창조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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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영화 마니아 섹션 정규 필진, Daum View 베스트 블로거기자, DVD Prime 객원 필자, 2007~2009 티스토리 우수 블로거 3년 연속선정, 2009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To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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