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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라이프/문화/취미

[설날] 사물놀이 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 '김덕수'를 만나다.

행위를 하는 모든 예술가는 행위를 위한 그 한 순간을 위해서 자기 생을 다 걸고 살아가는 거라고 합니다. 어느 장소이든 어떤 내용이든 공연을 하는 그 순간만은 사람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가슴 저리게 하기에 세상에 도전하는 주인공, 김덕수로 살 수 있노라고.

난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말을 하는 그의 주위로 꽹과리며 북이며 부채를 휘젓는 또 다른 그가 보일 정도로. 그리고 ‘언젠가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마음에 가슴 저리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우리가 힐끗 보던 사물놀이를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김. 덕. 수.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름입니다. 유명세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는 것은 그가 전통연희 상설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가 마치 판소리를 하듯 공연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저요? 조상님 덕이죠. 공식적으로 데뷔한 건 5살 때였어요. 재능을 발견한 것도, 우리 음악을 그렇게 일찍 만나 평생 가슴 떨며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조상님 덕이고, 아버님 덕분이죠. (그는 아버지 김문학에 의해 남사당에 입문했다고 합니다.)”

사실 김덕수 선생의 조상님 덕은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가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나라의 음악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김덕수’라는 이름 세 글자가 우리 음악에서 가지는 의미를 조명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일본 제국주의와 곧바로 밀어닥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 속에서 끊어져간 우리 음악의 숨통은 단 한 사람, 김덕수 덕에 이어졌습니다. 더 고마운 일은 세계적으로 우리 음악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음악이 ‘우리끼리’ 이해하는 음악이 아닌 세계가 감동하는 한국의 문화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덕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 치고 장구 치는 평생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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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출발점은 1978년 대학로 소극장에 나타난 네 명의 사나이들이었지요. 꽹과리와 징, 장구, 북을 손에 쥐고 나타난 그들은 사물놀이를 ‘공연’했습니다. 논밭 한쪽에서 농사일의 신명을 돋우는 우리의 미덕 정도로 인식되던 사물놀이를 무대 음악화한 것은 우리나라 음악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계는 그들을, 우리의 음악을 주목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을 힐끗 바라보는 데 그쳤지요. 30년이 지나고 세계는 더 많이 김덕수 사물패를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부터 이게 ‘배고프다고 하고 배부르다고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해외공연을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나이였죠. 정권이 수없이 바뀌고 세상도 변했지만 저는 여전히 장구 치고 꽹과리 치는 게 그렇게 좋아요. 가슴요? 벅차오르죠. 지금도요. 하면 할수록 더요. 어렸을 때는 세계 음악인 누구도 못하는 음악한다는 게 뿌듯했고, 청년이었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 음악을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아껴주는구나’라는 걸 알게 돼서 보람을 느꼈죠. 사물놀이를 창단했을 즈음이네요, 그때가. 그러고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님이 제게 물려주신 사명이나 책임 같은 걸 자연스럽게 느꼈죠. 음악으로 한 시대를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요. 지금은 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 모두 다 물려주고 가야죠. 천년 만년 이어질 수 있게요.” 

김덕수 선생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적인 에너지, 그 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사물놀이 교칙본을 만들어 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했고 사물놀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여러 단계로 나누어 편집하고 악보를 만들고 꼼꼼히 주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교칙본을 보면서 ‘우리 음악’만이 가지는 힘이 느껴져 신명이 났습니다. 

최고가 될 수 있는 시작은, 내 현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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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배우고 싶어한다는 한국 전통음악을 접해본 기억은 운동회 때 잠시 손에 쥐어본 ‘소고’가 전부입니다. 사물놀이를 한다고 운동장 한쪽에서 꽹과리를 울리는 무리를 특이한 사람들로 여기며 힐끗거린 게 전부입니다. ‘김덕수라는 사람이 사물놀이를 한다는데 해외에서는 꽤 알아준다더라’라고 여긴 게 전부입니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 전통 음악의 현주소입니다. 하지만 김덕수 선생은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음악인이 아니었고 편견 정도는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음악, 이렇게 좋은데 왜 몰라주냐고 울부짖는 대신 그는 한 손에 꽹과리를 들고 어깨를 들썩여 보였습니다.
“네, 다녀왔지요. 미국 오바마 대통령 취임 축하 공연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게 있나요. 저희 음악 원하는 관객이 있으면 다 같은 공연이지요. 오바마 대통령 진영 중에 젊었을 때 저희 음악을 들어본 분들이 있어서 그분들이 다시 찾아준 거죠. 우리 사물놀이, 세계적인 공연에 많이 초대돼요.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티켓 주고 먹는 물까지도 계약서에 넣어서요. 전 그게 우리가 아니라 우리 음악이 대우받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그래도 ‘얼마짜리’ 공연하는 김덕수, 이런 예술인은 싫어요. 그저 어깨 들썩거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갑니다.

매 공연이 새로운 도전이라는 예인, 김덕수는 한화인에게 말했습니다. 최고에 오르는 사람은 ‘바닥’ 또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닥을 모르면 지금보다 나빴던 상황은 생각 못하죠. 최고는, 부자는, 행복은 누구나 내 현실에서 느낄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최고다’ 지금 내 회사가 ‘최고의 회사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게 최고가 되는 시작입니다.”

글> 한윤정 Mbinc   사진>  김동율

*이 내용은 한화그룹 사보 <한화한화인>의 희망인터뷰 내용을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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