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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스토리

 

 

마음에 커다란 위로가 필요할 때, 지금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혼란스럽고 두려울 때,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서점에 깔린 좋은 책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야 하는 길은 언제나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내 지나온 나날이 나의 가장 커다란 멘토가 된다는 사실을. 행복한 육아일기의 주인공 박정희 할머니젊은 사람들 보다 더욱 찬연하고 보석처럼 빛납니다. 지나온 인생이 길러온 자기 자신 속의 현인(賢人)이 있고 오늘에 감사 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박정희 할머니가 직접 들려주는 '행복한 육아일기' 이야기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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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니는 아름다운 노년의 결정체와도 같습니다. 그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다섯 남매를 키우며 직접 그리고, 쓰고, 제본을 엮어 만든 다섯 권의 육아일기 때문입니다. 시대상까지 꼼꼼하게 엮은 그 책이 인쇄본으로 출판되며 그의 주변은 유독 북적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발에 채이며 굴러다니던 것인데”라며 웃는 그는 “다른 집에서도 다 그렇게 만들어 주는 줄알았다우”라며 주변의 소란에 어리둥절해했지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하나. 1923년, 일제 강점 하에서 한글 점자를 만들어 낸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나 경성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가 일본 여학생들을 제치고 우등으로 졸업, 교사 생활을 했던 당시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당시 자신에게 손 내밀던 수많은 혼처를 뒤로하고 운명처럼 만나게 된 남편은 하필이면 대식구가 남편의 월급 80원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난하디 가난한 의사였지요. 시부모님과 시동생들까지 적을 때가 열댓 명이었던 대식구가 좁은 집에서 복닥이며 ‘식량을 대느라 고생’일 정도로 지독하게도 어려웠던 삶. 그리고 해방과 전쟁, 피난과 새 살림. 이 격랑 속에서 들어선 아이들. 그 와중에 어떻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느냐 물었습니다.

 

“그땐 그래도 벅차고 즐거웠던 일이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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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정과 시댁은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가세도 다르고 가풍도 달랐지요. 그런데 우리 두집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집 안에 일본의 물건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사범학교를 나왔지만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터라 미술에도 제법 재주가 있기는 했다고.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시아버지 유두환 목사는 서슬이 퍼런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금처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교사로 재직할 당시 친분을 쌓았던 일본인 음악교사가 해방 이후 한국을 떠나며 선물로 주고 간 미술도구를 어머니가 맡아두었다 건넨 것. 강가로 빨래를 하러가다 빨래하는 아낙들의 풍경이 너무 예뻐 그 길 그림을 그리며 너무나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났다고. 그런 그이니 어쩌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도 직접 그리고 쓰겠다고 생각한 것이 별난 결과는 아니었겠지요.


“어느 날 우리 명애(첫째 딸)가 오더니, ‘어머니, 어머니 나도 그림책 하나만 사주어요’ 하길래 좋다하고 돈을 들고 책을 사러 나갔지요. 그런데 어쩌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지 않겠어요? 그림이 마음에 들면 글이 시원찮고, 글이 좋으면 그림이 엉망이고. 그래서 빈 손으로 돌아오는데 아이가 그러더군요. ‘어머니, 나는 그림책을 못 가지나요?’ 그러길래 ‘아니야 어머니가 만들어줄 거야’ 약속했죠.”


그렇게 첫 번째 일기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둘째와 셋째, 넷째를 지나 막내 아들에 이르기까지 다섯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제호로 한 다섯 권의 일기기 완성됐지요.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아이들이 태어나 한글을 배울 때까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자신이 태어난 배경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었는지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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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육아일기를 청했습니다. 출판된 책도 있지만 아름다운 실물이 궁금했지요. 국가기록원의 요청으로 기증했다가 반환을 요청해 가지고 있는 보물들. 그의 맏사위인 서울대 권태환 명예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집 가보’인 그 일기들을 열었습니다. 끔찍하게도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교회 주보 뒷면에도 쓰고, 쌀 포장지에도 쓰고, 깨끗한 빈면이 있는 종이라면 알뜰하게 챙겨 썼습니다. 모두 손으로 꼼꼼히 바느질한 제본에 고운 천들이 덧대져있습니다. 아이를 업었던 포대기를, 입다 버리게 된 헌 옷을 잘 갈무리해두었다 아이들 육아일기의 표지로 썼다는 것입니다.

 

넷째 딸 ‘순애’의 편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아이들의 주변을 기록했는지 드러납니다. 순애를 낳던 날과 시간, 낳았을 때의 식구들, 낳았을 때의 세계 정세, 순애를 낳은 율목동 집, 순애가 자라난 화평동 집, 이름과 별명, 순애를 낳았을 때의 아버지,어머니, 순애가 좋아한 음식, 순애를 길러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한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의 기록. 마지막으로 너를 가르쳐주신 국민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이름들까지.

 

아이들이 아름답게 자라나는데 이만큼 완벽한 콘텐츠가 또 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너를 기르고 있는지 공치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록한다는 자체만으로 모든 수식어를 압도하는 사랑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를 수석 입학하며 입학선서를 하는데도 지켜보지 못했을 정도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는 틈날 때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남기며 그 속에 언젠가는 발견될 진주 같은 마음을 심어두었습니다.

 

사실 그는 오랜 시간 이 육아일기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성혼하여 집을 떠날 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제각각 챙겨갔다는 것도 몰랐다고. 딸로부터 받아와 수십 년 만에 다시 그 일기를 열었을 때 그는 방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진료 중에 집에 들러 “뭘 보고 그렇게 우느냐”해서 일기를 들고 나간 남편도 진료실 한 구석에서 그 일기를 보고 한참을 울었다고. 두 부부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옛 기록들을 보며 한탄과 감탄이 뒤섞인 감격을 맛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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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유명인사’ 반열에 올려놓은 이 육아일기 이 외에도 그는 왕성한 기록가이자 수집가이며, 창작자입니다. 그의 집 장롱에는 언제부터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가계부와 일기와 에세이가 있지요. 여전히 그는 하루 한 점의 그림을 그리고, 200자 원고지에 일상을 기록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를 놓지 않으려는 그 안간힘이 한국 점자 역사를 기록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버지가 남기신 메모, 아버지가 작업하셨던 책들이 빼곡히 나왔어요. 그걸 오빠들이 다 버리려는 걸 내가 손수레에 잔뜩싣고 챙겨왔지요."

 

그 물품들은 남편도 “뭐하러 챙겨왔냐”고 하는 걸 보이지 않게 천장에다 꼭꼭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인천시 시각장애인복지관이 개관될 때 모두 기증했지요.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박두성 선생의 1931년 성경 점자 원판작업에는 박정희 할머니가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겨우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아버지가 점자를 새기실 수 있도록 옆에서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인 것입니다.

 

“겨우 열살 남짓한 꼬맹이인데, 실수가 왜 없었겠어요. 얼마나 호통을 치시고 꿀밤을 때리시는지 하도 머리를 맞아서 멍텅구리가 되거나 엇나갈 수도 있었던 것을 그러지 않고 이렇게 반듯하게 자랐으니 감사해 하시라고, 아버지가 나이 많이 드신 후에 얘기했었죠.”


엄격했던 아버지를 나약한 남자로 인정하게 된 이야기, 평양 사투리를 일본어로 번역해주어야 알아듣던 새색시 적 이야기, 얼렁뚱땅 살림을 흡수합병(?)한 얄미웠던 시동생들 이야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때로 그것은 정신없이 빠져드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역사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 ‘나를 포장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부풀려질 사람도 아니니, 그저 오늘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라고 써달라 얘기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오늘 이렇게 주어진 날들이 있으니 우리는 좋은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어요. 내곁의 아이들도 얼마나 예쁜가요? 우리는 삶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그저 충실히, 재미있게 살아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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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나열된 문장들이 그와의 약속을 지켰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박정희 할머니 와의 인터뷰가 누군가에게 ‘희망’으로 전해졌다면 그것은 문장의 힘이 아닌 박정희 할머니, 자신의 힘 일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때 그 시절을 떠 올리며 눈물을 훔치기도 웃음을 띄우기도 하는 일기를 오늘부터 기록해 보는 것 어떨까요.

 

 

* 박정희 할머니

1923년 한글 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1944년 의사 유영호와 결혼하여 슬하에 4녀1남을 두었으며 이들이 태어나 한글을 배울 때까지를 기록한 그림 육아일기를 쓰고 그렸다.67세에 수채화가로 데뷔했으며 한국점자도서관 건립과 인천맹인복지회관 건립 등을 위한 개인전을 여러 차례 열었다. 작고한 남편이 개업한 ‘평안의원’ 자리에 ‘평안 수채화의 집’을 열고 수채화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

 

첫째 딸 명애의 육아일기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 시리즈의 첫 번째 본이다. ‘너를 낳았을 때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너를 낳았을 때의 식구들’, ‘우리나라와 세계의 일’, ‘집’, ‘옷’, ‘아가 때 말’, ‘장난감’, ‘ 명애의 공부’, ‘이름, 너를 낳은 시간’, ‘명애의 시’ 등 첫 아이가 일곱살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다. 첫 아이에 대한 벅찬 축복과 기대, 서툴렀으나 최선을 다했던 엄마로서의 노고가 가득히 담겨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식구들 면면을 캐리커처로 그려 놓기도 하고 당시에 귀했던 사진을 찍어 소중하게 부착해두기도 했다.


막내 아들 제룡의 육아일기
그의 육아일기 마지막 시리즈다. 내리 딸 넷을 낳고 많은 식구들이 기다리던 차에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권두언에 기쁨이 듬뿍 묻어나기는 하나, 정성은 앞서 누나들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머리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제룡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나, 또 어떠한 분들의 축복과 수고로 컸나, 이런 일들을 골라서 간단히 적어 보련다. 네가 언제나 자기를 그지없이 사랑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어떠한 힘든 고비에서도 착하게 행복하게 이겨나가라고 이 글을 써주련다. 엄마.”

 

 

* 취재 더서드에이지 / 사진 이원재 Bomb 스튜디오

* 이 컨텐츠는 한화그룹 사보 한화한화인 '희망인터뷰' 내용을 재구성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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