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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라이프/문화/취미

다른듯 닮은 고흐와 고갱의 삶과 작품 들여다보기!

 

주말 잘 보내고 계시나요? 오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두 미술가의 숨겨진 이야기를 살짝 공개할까 해요. 그 주인공은 바로...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화가 고흐와 고갱입니다. 두 사람의 작품 세계는 극명히 달라 어떤 공통점을 찾거나 접점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거의 하지 못할 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알고 나면 더욱 흥미로운 두 사람의 관게 속에서 피어난 불멸의 작품, 그리고 그들의 순탄치만은 않았던 인생을 살며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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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센트 반 고흐와 외젠 앙리 폴 고갱은 지금 누리는 대중적 인기 만큼이나 미술사에서도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 각각의 작품 세계도 그렇지만 그와 더불어 동시대를 살았던 독특한 인연 또한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지요. 이 둘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나 연극, 문학 등이 꽤나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는데요. 둘 다 성이 '고'씨라고 농담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둘은 묘하게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달랐던 삶의 작품 그리고 관계를 이뤘습니다.

 


광기를 감춘 성직자와 현실적 리버럴 리스트 사이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이룩해 낸 결과물이기에 '작품은 곧 작가의 인생이다'라는 말을 낳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라는 말과 함께 고흐와 고갱도 마찬가지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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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의 성직자 아버지와 서적상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흐는 당시로써 좋은 배경을 가진 가문에서 나서 영어, 독어, 불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만큼 양질의 교육을 받았죠.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미술을 접했던 이유는 집안이 꽤 걸출한 화상가였기 때문이기도 하죠. 실제로 그는 브뤼셀과 런던 분점으로 파견되어 가업인 화상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한 고흐였지만 그는 사실 성직자가 되고 싶어했다고 하는데요. 1880년 고흐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이 역시 종교에 봉헌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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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먹는 사람들>(1885)은 바로 이러한 심적 상태에서 제작된 작품입니다. 1886년 동생 테오와 함께 파리로 간 고흐는 고갱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요. 이듬해 파리에서 고갱과 만나던 고흐는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주한 고흐는 작가의 창작촌을 조성하고 싶어했고, 고갱도 처음이에 동참했으나 곧 고흐를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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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레미제라블> 캔버스에 유채 45X55cm 1888

고갱은 자신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에 빗대어 표현했다. 이 작품은 고흐에게 헌장한 작품.

 

고갱은 1848년 기자였던 아버지와 정치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 외가가 있는 남미 페루로의 여행 중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고갱은 1865년 부터 집을 떠나 해군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주식중게인으로 일하게 되는데요. 고갱이 늦은 나이에 본직을 유지하면서 미술공부를 시작(1874)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와 더불어 고갱은 회화뿐 아니라 공예작업도 선보였으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기도 했어요. 제대로 된 가족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것처럼, 고갱이 고흐를 만나게 된 계기는 고흐의 동생 테오가 화랑을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테오는 고갱의 작품을 사들였고 작품은 꽤 팔렸다고 전해집니다.

 

고흐와 아를에서 2달여의 짧은 동거 기간을 거쳤던 고갱은 고흐가 자살한 후, 작품을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모아 1891년 타히티로 떠납니다. 2년 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다시 작품을 팔아 타히티로 떠났고, 5년후 돌아 왔습니다. 1903년 고갱은 영면에 듭니다.

 

 

동고동락과 동상이몽 사이

간략히 살펴본 둘의 인생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둘의 작품은 표현과 시선, 삶의 궤적에 기반을 둔  주제의식에서 차이가 나는데요. 그러나 고흐와 고갱은 인상주의가 가진 한계를 넘고자 했던 강렬한 욕망을 지녔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1886년 파리에서 만나 1888년 아를에서 재회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를에작가 창작촌을 처음 구상했던 이는 고흐였어요. 고흐는 성직자들의 수도원 같은 창작촌을 꾸미고 싶어 했는데 이는 앞서 이야기 했 듯 가족 내력 때문이자 자신의 꿈이기도 했어요. 이처럼 고흐는 종교의 구도자와 같아서 자신에게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를 곁에 두고 생전 작품을 팔지 않았다고 해요. 고흐에게 작업은 일종의 정진이자 수행이었으니까요.

 

고흐는 아를을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방 4개가 딸린 '노란집'을 임차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만났던 고갱은 당시 건강상태 악화와 경제적 궁핍을 겪던 차였는데,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고흐는 고갱에게 자신의 게획을 담은 일종의 초청장을 보내지요. 이러한 고흐의 '고갱 돕기' 계획의 배후에는 고갱의 작품을 거래했던 테오가 있었음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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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888년 9월 21일 고갱이 결시을 합니다. 고흐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구요. 그와 더불어 테오의 솔깃한 재정적 지원까지 약속받은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는데요. 이렇게 어렵게 모신 고갱을 고흐는 진심으로 대해주었죠. 여전히 고갱은 자신에게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이었고, 고흐는 고갱이라는 태양만을 바라봤던 '해바라기'였으니까요. 


이랬던 그들의 사이가 삐걱대기 시작한 건 고흐의 고갱에 대한 집착과 고갱의 자유의자 부딪히면서 부터입니다. 우선 고흐가 생각하는 창작촌 운영방식이 문제였습니다. 고갱은 처자식마저 버렸던 로맨티스트이자 팔기위한 작품을 제작했던 현실주의자였지만 고흐는 자신이 세운 운영원칙을 고수하였던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거든요. 두달 여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았어도 사실 그들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이별이 숙명이었던 연인이었습니다. <고흐의 의자>(1888-1889)와 <고갱의 의자>(1889) 그것을 말해줍니다. 같은 대상을 소재로 표현한 작품임에도 고갱의 의자는 고흐의 그것보다 당당하고 화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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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의지> 1888-1889 런던 테이트 갤러리(좌), <고갱의 의자>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우)


심리학자들은 이 그림에서 촛대로 상징되는 고갱의 남성성을 그리고 뒷면 박스로 상징되는 고흐의 여성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고갱은 이곳에 머무른 2개월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표현양식을 보여주지만, 고흐는 아를(에서 가까운 정신요양소)에서 보냈던 시기(죽기 전 3년)에 그의 걸작을 쏟아내지요. 고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흐는 낭만적이나, 내게는 원시적인 것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색채만 해도 그렇다. 그는 두껍게 바른 물감으로부터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나...나는 덧칠한 화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고갱이 먼저 결별을 통보합니다. 그러자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지요. 고갱은 말없이 부르탸뉴로 떠나고 테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고흐는 1889년 초,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붕대로 두부(정화히는 잘린 귀)를 가리고 자화상을 그립니다. 고갱의 영향이 명백한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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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역시 명백히 고흐의 영향이 보이는 예수를 그립니다. 곁에 있었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그들이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서로의 영향을 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점입니다. 고흐가 자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1890)이듬해, 고갱은 타히티로 갑니다.

  

그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어린시절 죽었던 아버지, 페루의 피가 섞여 있던 어머니, 자신이 버렸던 처자식, 그리고 자신에게 애정과 동시에 집착을 퍼부었던 고흐, 고갱이 타히티에 있었을 때, 편지를 통해 프랑스에 있던 친구에게 보내달라 했던 것은 해바라기 씨였습니다. 아를의 '노란집'에서 고흐가 고갱의 방을 장식했던 바로 그 해바라기 말입니다.

이드라마는 비극이었을까요?

 


*이 내용은 대한생명 웰빙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the BEST'의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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