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걷기. 채식 커리로 점심을 먹고 숯불로 볶은 커피도 한 잔, 배화여고를 지나 대통령 맛집으로 유명한 ‘토속촌’을 스치고 길을 건너 통의통 한옥마을에 도착합니다. 빌딩 숲 아래 이토록 소박한 골목길이 있었나 싶은 통의동 한옥마을 끝엔 한때 천연기념물로 명성이 자자했던 백송(白松)이 그루터기만 남겨두었어요. 괜스레 애잔한 마음을 가다듬고 돌아서니 ‘대림미술관’ 앞으로 경복궁 담장이 위풍당당. 그래요. 우리의 걸음은 여기서 끝입니다. 여긴,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촌(西村)’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출처-영화 '건축학 개론']
봄볕이 내리쬐는 오후 1시. 사직동으로 향합니다. 사람의 걸음을 부여잡는 매혹적인 길. 이 길에 서면 엇박자로 걸음을 내딛는 것은 기본이요, 평범한 풍경도 짐짓 이색적으로 보입니다. 곳곳에 쉼표가 따닥따닥 찍히는 기분이지요. 이런 날에 딱 어울리는 밥상이 있습니다. 이젠 제법 이름이 높아 일부러 찾는 이도 많은 곳, 바로 ‘사직동, 그 가게’의 채식 요리입니다. 이곳은 티베트 난민들의 평화운동을 알리고 동참하기 위해 마련된 소통의 공간이자 인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신선한 양파와 토마토에 오직 천연 향신료만 넣어 5시간 이상 푹 끓인 가정식 인도 커리와 아이스 두유짜이를 주문하고 가게 곳곳을 눈으로 읽어봅니다.
좋은 기운을 가득 품고 있으니 앉아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것 같은 곳. 채식하는 이도 마음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곳.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일어서길 바라며 옆집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어쩜 두 공간이 나란히 있나 싶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옆집은 ‘커피한잔’. 주인이 직접 만든 로스터기를 이용해 숯불로 커피콩을 볶는 곳이지요. 한 모금 마시면 입 안 가득 커리 향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람의 손때가 한껏 묻은 물건들로 꾸민 소박한 공간이지만 깔끔하고 구수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니 이보다 편안할 수 없어요. 날 것 그대로 살아 있는 행복한 점심(點心)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서촌의 숨은 이야기. ‘커피한잔’에서 매동초등학교 앞길로 걸어가면 여고생들의 깔깔깔 웃음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배화유치원에서부터 배화여대까지 한곳에 모인 이곳은 알고 보면 우리의 문화재를 품고 있지요. 정문에서 가파른 언덕 위로 올려다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에 시선이 꽂힙니다. 1916년에 지어져 100여 년 동안 경복궁을 지켜본 이 건물은 ‘배화여고 생활관(등록문화재 제93호)’.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네요.
배화여고 건물 뒤에는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9호)’도 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일부러 꿋꿋하게 찾아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모를 공간에 위치하고 있지요. 사실 크게 볼 것은 없지만, 역사란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닌 게죠. 그러니 한번쯤 선현의 넋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서촌이니까요.
정확하게 이렇게 걷습니다. 필운대로 1길, 자하문로 5길, 자하문로 10길을 차례로 말이지요. 사직동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걷고 또 걷는 길. 분명 빌딩 숲이 가득한 세종로가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길은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지 않아요. 외려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헉헉 막히지요. 그래서 그런지 ‘느리게’라는 단어를 쓴 카페들이 많습니다. 오른쪽 왼쪽 고개를 돌리며 홀리듯 걸으니 더더 느려지는 걸음. 대충 블렌딩한 커피를 내린다 해도 느리다는 자체만으로 기분 좋아질 것 같은 그런 카페들 말이지요.
카페들을 스치며 발길이 닿은 아주 좁은 골목. 통의동 한옥마을의 시작입니다. 사실 한옥마을이라 하여 안동이나 전주처럼 우람한 풍채를 생각해선 안 됩니다. 여긴 빌라 사이로 옹기종기 몇 채 모여 있는 소박한 마을이거든요.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벽을 따라 돌아서기 바쁩니다. 그야말로 미로 찾기. 하지만 그래서 더 정겨운 궁궐 옆 작은 한옥마을이지요.
정확하게 서촌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 마을입니다. 북촌과 대비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요. 으리으리한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매력적인 마을. 두서없이 이어진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정표도 제대로 없어 길을 헤매기 일쑤지만, 그래도 서촌은 추억의 빛깔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어서 더 정겹습니다. 요즘 서촌이 회자되는 이유지요. 개인적인 바람으론 걸음이 더 이상 난무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또 개인적인 바람으론 꼭 한 번 이곳을 걸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길에선 사람 소리만 들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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