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처음 경험하는 이들의 이구동성.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이라고도 하고, ‘도심 속 시골’이라고도 일컫습니다. 무심결에 사라져버린 것들이 왠지 남아 있을 것 같은 낭만적인 곳. 바로 부암동입니다. 예쁜 카페가 시나브로 들어서고,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해 같은 감성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소소하게 이어지는 명소가 되었지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부암동만큼 불편한 동네도 없습니다. 대중교통이라곤 몇 대 되지 않는 버스가 전부요, 그렇다고 차를 가지고 갈라치면 주차장이 없어 곤욕을 치루기 일쑤거든요. 게다가 가파른 언덕은 또 왜 그리 많은 것인지. 걷다가 지치면 물 한 모금 사 마실 슈퍼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래도 주민들은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사람들은 기꺼이 느리게 걷는 길을 택하지요. 여긴 부암동이고 또 부암동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출처-MBC '커피프린스 1호점']
부암동 산책의 시작은 ‘부암동 주민센터’. 갈래갈래 이어지고 꺾인 길의 중심이요, 버스를 타고 내리기에도 적당한 명실상부 부암동의 랜드마크입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1020번, 7022번, 7212번 초록색 버스를 타면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 도착. 오른쪽 왼쪽 어디든 마음 닿는 대로 향하면 됩니다.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에 감싸인 듯 걸쳐 있는 부암동은 잘 모르는 이가 봐도 명당이라 여겨질 만큼 편안한 산세를 벗하고 있습니다. 지형적 특성 때문에 가파른 오르막이 많지만, 한 걸음씩 걸어 오를 때마다 산의 맑은 기운을 한껏 품는 것 같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예술을 유독 사랑한 문인들의 흔적이 많았나 봅니다.
부암동 주민센터 바로 옆길인 창의문로5길을 따라 걷는 길. 장난감 같은 카페들을 지나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드리워주는 언덕을 오르면 ‘현진건 집터’를 스치고, ‘반계 윤웅렬 별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현진건의 집터.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터만 남았어요.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이곳이 그 옛날 한 시대를 호령했던 소설가의 집인가 싶을 정도지요.
안타까운 마음을 살며시 접어두고 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반짝반짝 한옥과 마주합니다. 바로 ‘반계 윤웅렬 별장’. 개화파 지식인이자 독립협회 회장을 역임한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지은 별장입니다. 5년 전쯤 이곳에 갔을 땐 막힘없이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젠 후손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더군요. 다만 담장 너머로 설핏 볼 수밖에요.
이외에도 부암동엔 시인 윤동주의 문학관이 창의문 길 건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2012년에 문을 연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에 관한 다양한 사진 자료와 친필원고 영인본 등을 볼 수 있어요. 다만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니 참고하세요.
마당에서 팔다가 점점 인기를 얻자 집을 조금씩 개조해 확장한 음식점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인왕산이 열리면서 함께 문을 연 곳. 깔끔하고 담백한 손맛 하나로 남녀노소 입맛을 사로잡은 곳. 바로 만두 전문점 ‘자하손만두’입니다. 한 그릇 음식으로 만두만한 것이 없다고, 만두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담음새도 정갈한 이곳의 만둣국은 때론 담백하게 때론 매콤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시금치, 당근, 비트로 색을 낸 만두피로 만든 만두는 보는 즐거움도 있지요. 우리 밀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요, 계절 재료를 아낌없이 쏙쏙 넣습니다.
특히 5~6월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만두도 있는데, 바로 ‘엄나무순 만두’.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엄나무순을 격하게 좋아하는지라 엄나무순 특유의 향이 그득한 이 만두 또한 정말 맛있더군요. 표고버섯, 숙주, 두부 등이 속 재료로 함께 들어가니 채식을 하는 이들에게도 안성맞춤입니다. 느리게 걷고 또 건강한 밥상으로 즐기는 부암동의 하루. 이보다 더 착할 수 없어요.
자하문로40길 초입에 위치한 ‘클럽 에스프레소’. 언덕을 오른 버스가 본격적인 부암동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카페입니다. 부암동의 터줏대감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요. 올해로 23년째 커피를 볶고 또 파는 일명 커피 상점. 부암동 카페들의 시조인 셈입니다. 붉은 벽돌 건물이 운치 있는 이곳을 지나 자하문로40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촬영지로 유명한 카페 ‘산모퉁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부암동은 사람 냄새가 짙게 밴 동네인지라 그에 걸맞은 드라마들이 종종 터를 잡고 촬영을 하곤 하지요. <내 이름은 김삼순>, <내조의 여왕>, <찬란한 유산> 등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이후 촬영 장소는 부암동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카페 ‘산모퉁이’는 이미 다 알다시피 가장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기실 부암동을 결정적으로 널리 알린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드라마로 시작했으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산책길이 된 부암동. 그 옛날 문인들의 풍류가 바람 타고 솔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동네입니다. 수수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속 좁지 않은 곳. 알고 보면 집집마다 사연들이 알알이 맺혀있는 곳.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또 올라 종아리가 뭉쳐 아파도 또 다시 밟고 싶은 길이 매력적인 이곳은 부암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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