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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바둑기사 '조훈현'씨가 말하는 명인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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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응창기배 결승전.
 
2대2로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먼저 패배를 인정하고 돌을 던진 사람은 중국의 섭위평이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화교인 싱가포르는 섭위평에게는 홈이나 다름없었지만 승부에 대한 압박감 탓에 평정심을 잃은 그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결승전 마지막 대국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죠.

한국인 기사로서는 유일하게 대회에 초청받아 홀로 싸웠던 37세의 조훈현은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전까지 세계 바둑계의 변방으로 취급받았던 한국은 이날 조훈현의 응창기배 우승으로 세계 바둑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는 “그날의 기쁨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의 회로 저 깊숙한 자리에 오래도 록 저장되어 힘들 때마다 은밀하게 꺼내 되새겨보는 항생제로 남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미지출처 / 경향신문(1986년)>

반상 위에서 빛나는 영원한 승부사 조훈현, 그를 만나 근황과 철학을 들어보았습니다. 
 

바둑 전신(戰伸) 이라 불리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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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에 바둑돌을 처음 쥔 이후 단 하루도 바둑돌을 잡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1962년에 아홉 살 7개월의 나이로 프로 기사가 되어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운 이후, 대한민국 최초 9단 등극(1982년),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158회), 타이틀전 최다 출전(233회), 통산 최다승(1837승) 등 바둑 기사로서 작성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을 작성했지요. 한국 바둑뿐 아니라 세계 바둑 역사에서도 조훈현이 남긴 족적은 깊고 선명합니다. 


젊은 시절, 그렇게 대기록을 쌓고 있던 ‘한창 때’의 조훈현은 더없이 날카로웠습니다. 수세에 몰려 판세를 뒤집기 힘들 듯하다가도 허를 찌르는 한 수로 상대방을 흔들어댔고,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특유의 빠른 공세로 승기를 낚아채곤 했다.

“누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전쟁의 신, ‘전신(戰神)’은 오직 한 명 조훈현에게 만 허락된 칭호였습니다. 하지만 59세, 지금의 조훈현은 스스로 승부를 향한 집착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고 말합니다. 


승리 대신 순리를 찾은 노장기사 

“사람이 계속 이길 수는 없죠. 10대나 20대였을 때는 정상에 서고 싶어서 거기에만 집중했던 거고, 지금은 집착이 없어졌어요. 지금은 승부에 일희일비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한판 한판이 결승으로 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압박감에 시달리며 오로지 승리를 향해 달렸지만 이제는 순리에 맡기고 물처럼 흘러가는 바둑이고 삶이에요. 전장을 떠난 장수이죠.”

빠르고 공격적인 대국 스타일로 ‘제비’, ‘전신’이라는 별명을 훈장처럼 갖고 있던 노장 기사는 승리 대신 순리에 자신을 맡기며 이기는 바둑보다 바둑 그 자체가 주는 깊이와 묘미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날카롭게 빛나며 판세를 조망하던 눈은 부드럽게 상대를 포용하며 쓰다듬고, 승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나이가 들어 젊은 기사들에게 이길 만한 체력도, 기력도 모두 부족하다’며 겸손하게 뒤로 물러섭니다. 

실제로 요즘 언론에서 ‘조훈현’이라는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아요. 얼핏 보면 출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1차전에서 탈락하는 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순위에 오르지 못한 때문이라 하는 게 맞습니다. 

“예전에야 늘 박수 받는 위치에 있었고, 화려한 성적을 내곤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하죠. 대신 바둑 그 자체를 즐기면서 후진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요. 예전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재미’로 바둑을 둘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 여류 기사들과 45세 이상 남성 기사들이 단체전을 펼친 ‘지지옥션배 여류 대 시니어 연승전’에서 그는 아직 무뎌지지 않은 칼날을 내비쳤습니다. 초반 연패로 수세에 몰렸던 시니어 팀은 부장(바둑 단체전에서는 주장이 마지막에 등장하고, 그에 앞서 부장이 나선다)으로 등장한 조훈현의 8연승과 이어진 유창혁 9단의 3연승 덕분에 우승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었죠.

“단체전은 동료가 잘해주면 되니까 개인전에 비해 부담이 적은 편이지만, 나의 패배가 팀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가니 한수 한 수 방심할 수 없지요. 때문에 집중해서 운영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상대한 후배들이 모두 뛰어난 기사들인데 이번에는 제가 운이 좋았어요. 그나마 마지막에 이렇게 8연승을 한 덕분에 화제도 되었고, 많은 분이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승부를 떠났다’거나, ‘이제는 이기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국수 조훈현. 하지만 백 배 양보하더라도 타고난 승부사 ‘조훈현’에게 ‘즐기는 바둑’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는 여전히 바둑을 ‘재미로’ 둘 수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대국 상황이나 성격에 따라 그 무게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경기에서 압박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다는 거죠. 50년 동안 대한민국의 명예를 짊어지고 프로 기사로 살아온 그의 말에서 진심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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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이 말하는 명인이 되는 길이란? 

"인생, 인품, 인성을 이룬 후에야 명인이 되는 법이죠." 
‘소리 없는 전쟁’을 수없이 치러내며 평생을 기사로 살아온 조훈현이라면 바둑에 통달하고, 인생을 달관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듯했는데요. 그에게 바둑에서 얻은 인생의 교훈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릴 적 바둑 스승(고 세고에 겐사쿠 9단)은 사람이 되려면 인격, 인품, 인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따지고 보면 이 중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저는 이 세 가지 덕목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어야 비로소 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바탕을 이룬 이후에야 명인이 되는 법이죠. 축구선수든, 기업가든, 사람 구실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틀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참된 근본을 갖추지 못한다면 치열한 승부와 위기를 극복하고 한길을 걷기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끊임없이 인내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단련하기를 멈추지 않은 조훈현 9단은 그래서 바둑의 명인임과 동시에 마음 수양에서도 역시 국수의 자리에 오른 명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려놓은 돌은 무를 수 없어요. 매일 쏟아 부듯 사세요." 
대국에서는 임전무퇴, 매섭게 몰아치는 강인하고 거친 사나이지만, 평소 조훈현은 젊은 후배들에게 늘 관대하고 농담도 곧잘 하는 ‘재미있고 좋은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들을 일은 하지 않았고, 바둑계의 큰 어른으로 부끄러운 일도 한 적이 없지요. 그의 모든 승부가 기록되어 후대가 복기하듯 그의 삶 역시 국수와 명인을 지향하는 후배들이 하나하나 헤아려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길이고 나침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수로, 한국 최고의 기사로 긴 시간 정상을 지켜온 조훈현에게 마지막 조언을 구했습니다. 

“특별한 말이나 격언을 들려드릴 건 없습니다. 다만, 제 지난 삶을 돌아보면 무슨 일이든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바둑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한번 내려놓은 돌을 무를 수 없는 것처럼 지난 뒤에 후회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치열하게, 지금 내가 두고 있는 한 판에 몰두하듯 내가 사는 하루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를 당부합니다. 전력을 쏟았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죠.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과정 또한 아름답고 그 실패를 복기하면서 더 멋지고 의미 있는 내일을 기약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격정적인 파도처럼 반상을 휘몰아치는 그의 대국을 자주 볼수 없어 아쉬운 지금, 조훈현은 더 이상 화려하거나 눈부시게 빛나지 않을지라도 언제까지나 바둑계에 머물며 아름다운 승부를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신기록을 만들어내고, 우리나라의 간판 기사로 각광받는 동안에는 오직 정상을 향해 달리고 수성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렸지만 이제는 바둑계를 위해 보다 크고 의미 있는 일,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의 승부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지지하고 또한 오랫동안 사랑해준 바둑 팬에게 보답하기 위해, 바둑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조훈현의 눈매에서 대국에 몰두하는 국수의 기품이 물씬 전해집니다. 

[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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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2년, 아홉 살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고, 대한민국 최초 9단에 등극,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158회), 타이틀전 최다 출전(233회) 등 한국 바둑계는 물론 세계 바둑계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많은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특유의 빠르고 공격적인 스타일 덕분에 ‘제비’, ‘전신(戰神)’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죠.
 

‘바둑천재’ 이창호 9단의 스승이기도 하다. 

 

글 / 이준관
*이 컨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한화그룹 공식 블로그 한화데이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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