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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라이프/문화/취미

요즘 ‘초딩’들은 모를 1990년대 이야기, ‘그땐 그랬지’


 

 “자, 애들은 가라~ 이 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무에게나 알려드리는 그런 약이 아니야~”

 

어릴 적 그 때를 기억하시나요? 한 때는 동네마다 한 명씩은 꼭 있었다는 약장수(?) 아저씨도 지금은 어쩌다 한 번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풍경이 되었습니다. 반면 지금은 너무 당연한 듯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놀라웠던 사건들도 있었죠. 오늘 한화데이즈에서 전해드리는 그 때 그 시절 충격적인 사건들, 일명 ‘그땐 그랬지’. 지금은 많이 달라진 그 때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그 시절 속으로 지금부터 출발합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버스의 뒷문은 자동이 아니었습니다. "안계시면 오라이~"를 매 정류장마다 외쳤던 하얀 모자의 그녀, 버스 안내양이 손수 문을 열어줬었기 때문! 지금 30대 후반 이후의 분들이라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버스 안내양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내버스에 항상 동승해야만 했었습니다. 양 주머니 가득 동전과 토큰이 들어있어 축~ 처져있던 유니폼도 기억이 나는데요.


버스 안내양을 소재로한 로맨스 소설, 영화도 무릇무릇 익어가는 가운데 1982년, 안내양 없는 시내버스가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대비해 서로 믿고 사는 사회풍토를 조성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았답니다. 버스 안내양에게 마음을 주었던 뭇남성들의 반대가 상당했다는 첩보(?)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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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5월 19일 경향신문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안내양 없는 시내버스는 승차권만을 이용해 탑승할 수 있었는데요. 승하차시 문을 열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정류장 안내 역할까지 했었던 안내양이 없어짐으로써 차내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앞문 승차-뒷문 하차의 문화가 조금씩 정착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 시골마을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일하는 버스안내원이 있다고 하죠? 시골마을의 버스안내원을 보며 그 때의 ‘안내양’을 떠올릴 뿐입니다.

 

 

 

남성들도 동전 지갑을 가지고 다니던 시기가 이었습니다. 커다란 서류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든 이유는 바로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매번 지폐만 내다보면 거스름돈으로 주머니가 볼록해지고, 이래저리 새어나가는 돈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요. 요즘에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살짝 힘들죠. 이러한 남성들의 고충은 버스카드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버카충’이라는 말을 알고 계신가요? ‘버스카드 충전’이라는 말의 준말로 10대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입니다. 그런데 이 ‘버카충’은 언제부터 처음 시작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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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1월 9일 한겨레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버스카드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1995년! 서울을 중심으로 버스카드 이용이 시작되기 시작했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토큰이나 동전을 주로 사용하던 시내버스에 처음으로 카드 단말기가 도입된 것인데요. 시범 운영 당시에는 5천원권, 1만원권, 2만원권 단 세 종류만 운영됐습니다. 단, 한 번 쓰고 버릴 경우 낭비가 심할 것으로 우려돼 재사용할 수 있도록 금액충전소도 운영했었죠. 하지만 이후에는 후불식 교통카드가 등장함에따라 이 충전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버스카드 이용이 점차 많이지면서 버스카드로 지하철 이용이 가능해졌고, 지금은 환승제까지 도입되어 지역 가리지 않고 한 장의 버스카드로 이용할 수 있는 세상 되고 있는데요.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버스카드, 하지만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혁신적이었답니다~

 

 

 

돈을 내고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고?? 당시만 해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껏 버리던 쓰레기를 용량에 따라 차등적으로 가격을 책정하겠다는 발표는 정말 충격적이었죠. 지금은 쓰레기 배출 시 규격봉투에 담아 요일별로 버리고 있지만, 규격봉투를 이용해야 하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된 것은 90년대였습니다. 정확히 1994년부터 시범적으로 실시가 됐고,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확대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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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11월 26일 한겨레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시범기간 동안에는 가구원 1인당 60리터 기준의 기본봉투를 3개월 단위로 지급하며, 이것만으로 모자라는 가정은 지정된 슈퍼마켓이나 담배가게에서 기본봉투보다 가격이 두 배가량 비싼 추가 봉투를 사서 버려야 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돈을 주고 쓰레기를 버린다는 이 제도에 반발하는 가정이 매우 많았다는 것 또한 지금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량제 실시는 쓰레기 배출량이 줄어드는 효과뿐만 아니라 환경 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더욱 컸기에 무사히 정착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여름만 되면 특히 골치거리가 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예전에는 음식물 쓰레기는 비료 등으로 재활용 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냥 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이와 함께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도 함께 증가하면서 '음식물 쓰레기 전용봉투'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 듯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 전용봉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쓰레기 종량제' 정식 시행 후 불과 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종량제 쓰나미의 충격 더욱 컸을 듯 합니다. 비록 음식물 쓰레기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등장했지만, 일반 쓰레기에 이어 음식물 쓰레기까지 돈을 내고 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충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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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12일 동아일보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지금은 음식물 건조기 등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등장했지만, 이 때 당시만 해도 음식물 전용봉투가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기억할만한 놀라운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뒤엎을 일생일대의 대사건! 바로 '국민학교'의 '초등학교' 명칭 개정입니다. 당시 잘 다니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요. 졸지에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 학생으로 뒤바뀌게 된 것. 이미 국민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이후 십수년동안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헷갈려하는 바람에 핀잔을 받기도 했다는 후문이...


1995년, 54년간 사용된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경된 배경에는 국민학교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일제강점기 때인 1941년 ‘황국신민’의 기초교육을 다진다는 일왕의 칙령에서 생겨났다는 고증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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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8월 12일 한겨레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물론 그 때도 반대여론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교육부는 ‘반세기 이상 써온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는 등의 의미에서 명칭 변경을 반대해왔는데요. 계속된 움직임 끝에 결국 초등학교로 변경되었죠. 참고로 그 당시 명칭 후보로 ‘기초학교, 어린이학교, 소학교, 새싹학교, 으뜸학교’ 등도 있었는데요. 요즘 ‘초딩’들은 절대로 몰랐을 사실! 여러분들은 어떤 명칭이 가장 끌리나요?

 


 

지금은 은행거래를 위해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합니다. 이는 1993년부터 시행된 금융실명제 때문인데요. 1993년 이전에는 비실명으로도 은행 거래가 가능했다는 사실! 지금처럼 개인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명이 아니어도 은행거래가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정치와 경제의 유착, 혹은 부정부패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는데요. 그 결과 은행, 증권사, 보험사 및 우체국, 마을금고 등 모든 금융기관의 거래를 실명으로 하는 금융거래실명제가 시작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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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8월 13일 한겨레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사실 몇 년간은 혼란이 계속된 듯 합니다. 당시에는 금융실명제가 오히려 과소비를 확산하거나 저축률 감소, 금융거래 기피 등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여론도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비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1997년, 나라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조치입니다. IMF 덕분에 당시 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를 가거나, 어제까지만해도 멀쩡히 있던 사무실 책상이 다음 날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우리의 국민성을 이러한 위기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외환보유액을 늘리고 경제를 살리자는 취지로 ‘금모으기 운동’이 본격 시작된 것이죠. 장롱 속에 꼭꼭 숨어있던 금붙이가 세상에 나와 한 달 사이에 2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화로 바뀌었는데요. 부모님 결혼반지뿐 아니라 막냇동생 돌반지까지 모든 금붙이가 총출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ㅜㅜ 금모으기 운동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우리 국민의 애국심의 결과’로 표현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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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5일 경향신문 /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후에는 ‘10원짜리 동전모으기’, ‘종이컵 모으기’ 등의 생활 속 모금활동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 모으기, 삐삐 모으기 등 유사한 모금행사도 함께 진행되었는데요.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캠페인이 전국민을 하나로 화합하는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이 중 여러분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앞으로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한데요. 몇 십 년쯤 후에는 지금을 돌아보며 ‘그땐 그랬지~’라고 이야기 할 것만 같습니다.ㅎㅎ 이 밖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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